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라노 키요모리 (문단 편집) == 평가 == 키요모리는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비정한 성격으로 공포정치를 행하는 [[폭군]]처럼 묘사되었기에[* 심지어 《[[헤이케모노가타리]]》의 "기원정사의 종소리 제행무상의 울림이로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머릿말에서는 '''[[조고]], [[왕망]], [[주이(양나라)|주이]], [[안록산]]''' 등과 비교된다.] 현대에도 이 인상이 강하지만, 다른 사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실제로는 온화하고 인정이 많으며 의리가 있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하찮은 자리에 있는 이라도 그 가족 앞에서는 큰 역할을 맡은 이처럼 대우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족 앞에서 크게 면목이 서서 기뻐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실제로 픽션에서 묘사된 [[폭군]]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폭정으로 민심을 잃었다지만 민심은 사실 천황가-후지와라가-불교 세력-각종 반란 세력-헤이케가 돌아가며 권세 부리던 헤이안 시대 내내 일반적으로 시궁창이었고, 겐지가 드디어 헤이케를 몰아내고 쿄토로 우당탕 밀고 들어오자 '아잇 x팔 차라리 헤이케 놈들이 나았네'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교토에 가장 먼저 입성한 겐지가 하필이면 당시에도 난폭하고 교양이 없는 게 단점으로 꼽히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헤이케모노가타리를 포함한 고전 문학에서 권력자가 민심을 잃었다는 것은 민본주의나 현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기보단 천황가, 귀족계, 불교계, 무가 등 기득권 세력을 불만족시켜서 정치생명을 잃었다는 뜻에 가깝다. 《[[헤이케모노가타리]]》 자체에서도 의외로 인간적인 묘사가 나오기도 한다. 가족들이 징징대거나 남이라도 성의 표시를 하면 곧잘 들어주는데, 고시라카와 법황과 후지와라노 나리치카[* 헤이지의 난 때도 키요모리에게 적대했기에 목이 애저녁에 날아갈 팔자였는데 시게모리가 쉴드쳐줘서 명줄이 이때까지 붙어 있었다.]가 자길 말 그대로 조지려는 걸 알고 먼저 죄다 조지려다가도 맏아들 시게모리와 동생 노리모리(둘 다 나리치카랑 인척 관계다)가 징징대자 못 이겨서 일단 살려주고, 헤이케한테 연공서열을 털린 [[도쿠다이지 사네사다]]라는 인물이 헤이케의 수호신을 모신 [[이츠쿠시마 신사]]에 찾아와서는 솔직하게도 승진 좀 시켜달라 기도하니 좌대신으로 쿨하게 승진시켜주는 호쾌한 면도 있다.[* 출처: 일본어 위키백과의 [[https://ja.wikipedia.org/wiki/%E5%BE%B3%E5%A4%A7%E5%AF%BA%E5%AE%9F%E5%AE%9A|도쿠타이지 사네사다]] 문서.] 딸이 병이 들자 안절부절하며 덕을 베푼다고 남은 나리치카 일파도 사면해준다.[* 그러나 시시가타니 저택을 뒷담 장소로 제공한 승려인 슌칸만은 풀어주지 않았고, 결국 슌칸은 유배지인 키카이가지마에서 죽게 된다.] 낙향해 있다가도 시게모리가 죽을 병에 걸렸다니 당장 송나라 명의를 구해 보내고 잉잉 울면서 호다닥 상경한다.[* 한참 옛날인《호겐모노가타리》에서도 19살 푸르딩딩한 시게모리가 첫 전투에서 멋 모르고 사람 두셋을 화살 하나로 꿰뚫는 괴물 미나모토노 타메토모한테 개기려 들자 아이코 내 아들 죽는다 아연실색하며 냉큼 부하 기병들을 보내 보쌈해서 끄집어내 살린 적이 있다.] 게다가 사실 폭군이라지만 이 사람이 정복적으로 누굴 선빵 치는 일이 없다. 조정과 불교 세력의 대립을 오히려 말리는 입장이었고, 결국 중들이 [[소헤이|칼 들고]] 수도로 쳐들어 오자 수방사 담당인지라 천황의 명으로 중간에 낑겨서 괜히 피 보고 원망만 먹는다. 헤이케가 휘말리는 거의 모든 문제의 발단은 황실, 귀족, 그리고 나기나타 들고 패싸움하는 각 유명 권력형 사찰[* 엔랴쿠지, 도다이지, 고후쿠지 등.]의 조직폭력 땡중들이 '헤이케 놈들 지방에서 굴러먹던 것들이 요새 건방져'하며 선빵을 날리는 것인데[* 심지어 선빵 치다가 역으로 털린 놈들은 참으로 뚝심있게도 결코 정신을 고쳐먹지 아니하고 살아서는 생령, 죽어서는 원령이 되어 저주한다.], 이에 사방에서 억까당해 세상 억울한 키요모리가 급발진하려 하고 그나마도 선비 컨셉인 시게모리[*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는 선비 컨셉인데 실제 역사에서는 오히려 헤이케가 끄는 어그로의 시초를 이 양반이 범했다. 섭정 후지와라노 모토후사한테 이 양반 아들내미 스케모리가 혼이 난 적이 있는데, 나중에 모토후사가 사과하는데도 지 아들 쪽 줬다고 굳이굳이 쫄따구들 보내 무력시위해서 배로 개쪽을 주고 위협하여 쪼까내고, 덤으로 이 사람이 참석 예정이었던 천황의 관례 일정까지 박살내버리는 초특급 땡깡을 부린다('''이걸 나중에 오히려 키요모리가 모토후사를 벼슬 자리로 살살 달래면서 수습했다'''). 덕분에 당연히 고시라카와 법황도 시게모리랑 비교적 친했다지만 '저 x끼도 헤이케네 어휴 x팔'하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모토후사는 시게모리 사후 고시라카와 법황이 시동 건 헤이케 본격 조지기 프로젝트에 제일 먼저 가담한다. 덧붙여 시게모리의 맏아들 코레모리가 시게모리 사후 헤이케 총대장을 맡게 되는데, 《헤이케모노가타리》의 묘사에 따르면 물새 소리에 놀라 패주하질 않나 헤이케 병력 '''7만'''을 절벽 밑으로 꼬라박아 없애질 않나, 헤이케가 뭘 해보기도 전에 풍비박산 나게 만든 주범으로, 삼촌 무네모리와 함께 작중 무능의 투탑을 달린다.]가 브레이크를 걸어 어찌저찌 원만히 수습되는 것이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초반 패턴이다. 그런데 시게모리는 중간에 아버지보다 먼저 병사하여 그 브레이크가 고장나버리고, 여기다 또 고시라카와 법황이 눈치도 없게 시게모리 49재 중에 여기저기 놀러다니고 냉큼 시게모리 장원을 몰수하여 키요모리를 열이 뻗치게 하면서 본격적인 노브레이크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헤이케모노가타리》의 화자는 지속적으로 온갖 미신적 불길한 징조를 열거하고 황실과 귀족과 불교 심기를 건드렸으니 헤이케는 조만간 떡락한다는 소리를 주구장창 해대지만 적어도 오늘날 시선으로는 도대체 누구들이 악당인지 갸우뚱한 부분이 많다. 전체적으로, 키요모리에게 붙은 분수 모르는 폭군 이미지 형성에는 헤이안 시대 귀족문화의 꼰대 기질(...)과 신토와 불교 신앙적 온갖 터부, 가마쿠라 막부 측의 프로파간다 공작이 많이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송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거점으로써 지금의 [[고베]] 지역에 신도시 [[후쿠하라#s-1|후쿠하라쿄]]를 건설하면서 그 앞바다에 인공섬 쿄가시마(経が島)를 조성하였는데, 이 때 매립공사가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아서 오래된 미신에 따라 동자 30명을 [[인신공양|바다에 제물로 던져서 공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에 키요모리는 '사람 먹고 살자고 하는 공사인데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거절하고 대신 [[불경]]을 적은 돌을 매립부지에 던져 넣어서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최근의 현대적인 해석에서는 키요모리가 아닌 [[헤이케]] 일족의 인물들이 과격하게 행동했던 것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는 상술된 관대한 성격 때문에 일족의 전횡에 대해서도 눈감아주는 경우가 지나치게 잦아서 참지 못한 무사들과 귀족들이 [[헤이케]] 일족을 적대시하고 민심 이반이 일어나 결국은 이를 틈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중심으로 반 [[헤이케]] 세력이 대두해 [[타이라]] 일족의 멸망을 제공한 실책을 범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불교]] 사원들과 자주 충돌을 빚었는데 이는 열렬한 [[불교]] 신자였던 천황가의 지지를 잃어 나중에 [[고시라카와 덴노|고시라카와 법황]]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거병을 인정해주는 대가를 맞이한다. 그래도 정치적 재량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재능도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최근에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기득권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년 동안이나 중지된 [[한국]], [[중국]]과의 재교역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 점만큼은 [[고시라카와 덴노]]와 죽이 맞았던 모양으로, 이에 천마들이 날뛰는 시대냐고 [[후지와라]] 씨족이 씹어대는 기록까지 나온다. 결국 취소되기는 했지만,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천도 시도를 한 [[후쿠하라#s-1|후쿠하라쿄]]는 다름아닌 현 [[고베시]]다. 현재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번성을 누리고 있는 고베로 천도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적극적인 해외교역 정책과 더불어 국제 교역에 후쿠하라가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는 뜻이다. 물론 천년고도(千年古都) [[교토]]의 이명을 보면 알다시피 후쿠하라 [[천도]]는 실패로 끝났으나 이건 키요모리가 잘못했다기보다는 [[교토]] 기득권층의 거센 저항과 각종 천재지변이 겹친 탓이었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처럼 별도의 정치체계를 만들지 않고 [[천황]]의 조정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한때는 구시대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현재는 실질적으로 무가 정권을 시작한 것은 키요모리라는 평가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오히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케]] 무가 정권을 잘 관찰하고 [[벤치마킹]]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것이 중론이다. 키요모리의 아버지인 타다모리 때까지만 해도 이세 헤이시 등 무사 가문은 중앙 정계에서 무시받는 존재였다고 한다. <헤이케모노가타리>에 의하면 키요모리의 아버지 타다모리는 출세해 공적과 인품 덕에 주위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자인 교토의 귀족들에게는 벼락출세한 자라고 무시당해서, [[도바 덴노|토바 상황]]의 앞에서 춤을 출 때 귀족들에게 '이세의 술병은 맨병이로다'[* '술병'을 당시의 한자로 '헤이시'라고 쓴다. 그리고 칠을 하지 않은 보잘것없는 병을 '素瓶(스가메)'라고 하는데, 일본어로 사시를 스가메라고 한다. 타다모리는 사시가 있었는데, 이 노래는 '이세의 헤이시 녀석은 사시 눈깔이구나'하면서 그의 눈을 비웃는 뜻도 되고, 동시에 언어유희로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빗대서 네깟 벼락출세한 녀석 따위는 상황의 어전에 나설 주제가 못 되는 초라한 것이라고 짓궂게 조롱하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그의 이름과 장애를 가지고 조롱했다고 할 정도. 일본에서는 이 굴욕적 사건이 키요모리의 출세욕, 권력욕에 불을 붙였다는 문학적인 평가나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 타다모리가 숨지기 1년 전인 1147년에는 [[야사카 신사]]에서 신관들과 키요모리의 하인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부하가 성지인 신사에 화살을 쏘고 격분한 신관들과 헤이케 하인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는데, 신사의 상위격인 엔랴쿠지의 승려들이 키요모리 부자를 유배하라는 청원을 하며 고소[* 한국어의 고소가 아니라 强訴라는 행위이다. 승려, 승병들의 실력행사 및 데모행위를 말한다. 헤이안 말기에 기득권 세력인 사원들의 고소는 [[시라카와 천황]]이 '카모가와 강의 물길, 스고로쿠의 주사위, 승병만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라고 탄식할 만큼 심한 사회문제가 되었다.]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도바 덴노|토바 상황]]이 보호해줘서 가벼운 처벌로 끝났다. 한때는 저런 굴욕을 당했던 헤이케의 존재감이 20여년 사이에 일변해 있었음과, 천황가와 헤이케의 관계상을 보여주는 일화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위키백과의 본 항목이나 [[고시라카와 천황]] 항목을 참조할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